0번이랑 연애 막바지...
오직 하나 뿐.... 다른 특별한 바램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해서 한 지붕 밑에 살며 매일 언제라도 보고 싶으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 이외에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 백수였고, 내 이름으로 가진 집도 절도 없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0번네 어른들 입장에서는 100%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그렇다고 인물이 잘나길 했나?, 돈이 많나?, 명예가 있나?, 빽이 있나? 없었다. 특별날만한 것이.. 아니 특별은 아니더라도 내 입장에서 내세울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있다는 것은 오직 몸뚱아리 하나하고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 하나... 하긴, 그 것도 가진 건 가진 거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인사드리러 간 어느날, 아마 집안 어른 두 분 중에 한 분의 생신이었던 것 같다.
딴엔 긴장하면서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목욕재개하고, 옷 갖춰 입고 두근거리는 가슴 안고 0번네 집을 방문했다.
그 집 입장에서는 전혀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나. 집안 어른 생신이라고 축하드리러 온 놈을 내칠 수는 없었으니...
할 수 없이 이런 저런 음식 갖춰서 상은 차려줬는데 독상이었다. 독상... 후후.
작은 찻상만한 밥상을 들고 0번은 나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에서 혼자 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습다. 당시, 어린 나이인 내 성질 대로하면 하나도 안 먹고 조용히 나와 버렸을텐데, 그 때는 0번 입장도 있고 해서 그냥 먹었다.
뭘 먹었는지, 맛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전혀 별개의 밥상이었지만.
식사를 하고 거실로 나와 바닥에 앉았다. 가시방석에 앉은 그런 느낌? 난 알았다. 그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손님들이 어지간히 돌아가고 난 자리였다.
장인어른 되실(?) 어른이 소파에 앉으시더니 대뜸 질문을 하신다.
‘자네, 앞으로 뭐 할 건가?’
당황스러웠다. 그렇잖아도 기 죽어 있던 판에.. 하지만 당당하게, 또박또박 말씀드렸다.
‘농사 지을 겁니다. 하지만 어른신 막내 따님, 절대로 농사꾼의 마누라 만들지 않겠습니다’ 라고..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르신은 0.1초의 생각할 시간도 없이,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도 그 당시의 분위기가 생생하다.
‘이 XXXXX야,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해라. 네가 농사를 짓는데 어떻게 마누라를 곱게 놔둔다고 하냐, 이런 나쁜 놈....’ 하시면서 ‘쾅’하고 문을 닫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
가슴 속에 숨어 있던 설움이 복받쳐 오르고, 쏟아지는 눈물을 삭히지 못해 구멍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사서 길을 걸으며 목 안으로 다 털어 부었다.
그리고 술 기운에 남의 집 공사하려고 터 닦아 놓고 울타리 쳐 놓은 것을 두 주먹으로 마구 훓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니 아픈 줄 몰랐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다.
0번이 옆에 서서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울면서 말리는 것도 전혀 귀에도,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별거 없는 나의 초라함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생하시며 자식들 키우시느라 밤 샘 모르고 일만 알고 생활하시는 부모님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마장동에서 수원 오는 시외버스를 타자마자 못 마시는 소주 마신 덕분에 그냥 골아 떨어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치 헤머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엄청난 통증과 어지럼증이 고문하였다. 나를 깨웠다.
도저히 버스를 타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기사 아저씨께 양해를 구하고 중간에서 내렸다. 어딘지도 모르겠다. 마구 뛰어 후미진 곳을 찾아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등의 통증이 장난 아니다. 두 손을 올려 보니까 주먹 살갖이 덜렁덜렁...
허물이 다 벗겨져 있었다. 술 마신 상태에서 객기(?)부리며 얻은 선물이다.
그렇게 해서 가슴 아픔을 안고 내려온 수원.
어머니, 아버지껜 당연지사 잘 얻어 먹고 내려온 것이다.
추억이다. 작은 추억.. ㅎㅎㅎㅎㅎ.......
내 고향, 서울을 떠나 수원으로 내려와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터를 잡고 생활하기 시작한 이 곳은 내게 2년이라는 세월동안 적응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넓은 땅에서 살다가 수원이라는 좁은 동네로 이사를 왔으니 모든 게 불편했다.
도대체가 어울어지질 않는다. 아는 사람들도 없다. 분위기도 어색하다.
더군다나 새로운 것, 새 사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내 성격까지 겹쳤으니..
0번네 집을 다녀온 후로 소원함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도 자기는 내 경우가 어떻던 상관없이 그저 나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따위를 정말이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인정이 되질 않는다.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랬다. 하지만...
좀 더 솔직히 얘기하면 내가 자신이 없어졌다. 당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바라고 있었다. 완전 비겁이요, 합리화였다. 그렇게라도 하면 마치 내가 영화속의 대사 한구절처럼 멋있게 비쳐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착각으로.....
우리의 소원함은 점점 심해졌다. 연락도 거의 끊고 지냈다.
몸도 마음도 의지와는 엉뚱하게 움직였다. 속내는 돌아버릴 것처럼 애절하게 그리워하고 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며....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집에서 얼마나 발악을 했는지 외출금지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갑자기 연락도 없이 수원으로 내려왔다.
그 반가움은 말할 수 없이 컸지만 속내에 감춰 두었다.
날 보러 내려온 게 아니란다. 자기는 수원 어머니, 아버지가 좋아서, 보고 싶어서 내려온 것이란다. 후후....
한 번, 두 번.....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 어르신들도 그런 막내딸의 시위를 결코 막지 못했다.
포기.. 말 그대로 포기였다.
단식투쟁까지 해가며 시위를 끝내지 않았던 막내딸의 각오에 이길 부모 있나? 없다. 아무리 천하장사 출신 부모라 하더라도 절대 이기지 못한다. 그런 경우엔..
그렇게 해서 얻어진 우리의 결혼.
어줍다. 웃긴다. 당시의 상황들이 말이다.
미움을 받을라니까 최대한... 일이 꼬일라니까 마구잡이로..... 결혼날짜 때문에도 그랬었다. 토요일로 하자, 일요일로 하자.
즉은, 답십리 어르신들께 나는 도저히 사위로 인정해 줄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랬든, 저랬든 아픔과 고통속에서 0번과 나는 어쨌든 싹을 틔웠다.
어렵사리 하게 된 출발. 그러나 승리했다는 쟁취감에 무척이나 신나 있었다.
우리 둘만의 시간, 신혼여행.
6인승 화물차를 끌고, 신혼 가방은 뒷 좌석에 내던져 놓고 우리 나름의 신혼여행을 즐겼다.
김해공항서 비행기타고 제주도로, 제주도에서 배타고 부산으로, 그리고 우리의 애마인 6인승 화물차를 몰고 전국을 순회하며 돌아다녔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당시 우리들만의 특별한 신혼여행길. 행복의 극치였다.
단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우리.
막막했다. 배추 종자, 열무 종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았고, 상추 종자, 파 종자, 쑥갓 종자 등등.. 제대로 생김을 구분도 잘 못하는 내가 어머니, 아버지랑 농사를 짓겠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섭거나 두렵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뒤에 계셨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나의 젊음이 있었다.
‘하면 되지 뭐... 알아 가면 되지 뭐... 남들은 처음부터 다 알고 시작하나? 나나 지나 똑같지..’. 그런 독백과 최면. 나의 무기였다.
어머니, 아버지도 처음부터 농사를 짓던 분들은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전에 미군부대 근무하시다가 쫓겨나시고(??) 방황하시다가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으로서 할 수 없이 택한 것이 농업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입장에서 오직 신용 하나만으로 수원에 남의 땅을 임대 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셨다.
아버지께서 임대한 땅은 완전 쓰레기 밭, 그러니까 쓰레기 매립장으로 쓰던 땅이었다.
잡초는 몇 년간 묵어서 어른 팔뚝만큼 굵었고, 괭이질을 하면 땅 속에서 쓰레기가 덩어리로 엉켜 올라왔고, 돌과 자갈이 섞인, 말 그대로 황폐화되어 못 쓰는 땅이었다.
쓰레기 밭이었다. 쓰레기 밭...
동네사람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그 땅을 밭으로 일구려는 아버지의 열정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심지어는 술 마시고 와서 만만하게 보인 아버지를 해코지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내 꿋꿋하셨다. 그렇게 뼈와 살을 녹이는 각고의 노력으로 2년만에 작물을 심을 수 있는 정도의 밭으로 만들어 놓으셨고, 그동안의 가족들 고생은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였다.
먹고 살 돈이 없어서 비싼 이자를 내는 일수돈을 얻어야 했고, 등록금도 다 남의 빚으로 해결해야 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철칙이 있으셨다.
가족들 굶주리거나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니는 경우는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정말이지 처절한 싸움이었다. 아버지와 아버지 자신과의 싸움..
당시에 나는 서울에서 가끔 내려와 그렇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보고, 서울로 올라가는 전철을 타기 위해 수원역 지하도를 걸어가면서 참 많이 울었다.
복받치는 눈물을 참지 못해 길거리에 눈물을 뚝뚝뚝 흘리며 걸었었다.
새벽까지 수확한 오이를 선별하고, 그 오이를 박스에 정성스럽게 담아 자전거에 매단 리어카에 잔뜩 싣고 왕복 9Km나 되는 길을 매일 새벽마다 다니셨던 아버지. 하루에 몇 시간이나 주무셨는지..
얼굴은 흑인처럼 새까맣게 탔고, 키 작은 어머니는 아버지 보조하시느라 엉망이셨다. 아픈 허리를 펴지 못해 구부정하게 걸어 다니셨고, 손톱에는 시커먼 때가 빠질 날이 없었다.
자식들은 서울 집에서, 부모님은 농장 안의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셨다.
집이 없으니까 거처로 마련한 비닐 하우스 안이 곧 집이었는데 습기 올라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비닐을 깔고, 그 위에 스치로폼, 그 위에 전기장판, 그리고 담요.....
그렇게 가족이 서울과 수원에 떨어져 생활하는 동안 부모님들께서는 자식들에 대한 가슴 아픔이 얼마나 크셨을런지...
세월은 우리 가족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도 굳어졌다. 가족이 떨어져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고뇌와 갈등, 수원에서 농사지으며 서울로 다시 올라갈 수 없었음을 느낀 것, 먹고 살기 위해 정착해야 안정된다는 판단 등등...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버지께서는 서울집을 정리하고 수원으로 내려와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임시거처를 만드셨다.
그 때가 내가 0번과 결혼을 할 즈음이었다. 막내와 부모님은 비닐하우스에서, 우리 부부는 작은 집, 전세를 얻어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농사를 시작한 때였다.
농사가 뭔지, 농업이 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부모님을 도와서 어른들 덜 힘들게 해 드려야 하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시작한 농사.
나의 농업에 출발은 오직 그 것 하나였다.
상추, 쑥갓, 시금치, 열무, 얼갈이 배추, 쪽파, 실파 등 엽채류가 내 농사의 자식들이었다.
첫 달부터 무대포로 시작하여 1년 365일 중에 무려 360일 가량을 하루도 안 빼고 생산한 채소를 도매시장에 출하 하였다.
이쑤시게처럼 가느다란 열무를 내 첫 작품이라고 작업해서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도매시장에 출하했을 때, 사장님께서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이걸 열무라고 작업해 가지고 온 거야?’했고 나는 뭐가 잘못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던 기억.
상추를 부채만하게 키워서 최고 상품인냥 출하했다가 한 박스도 못 팔고 몽땅 버렸던 기억, 40cm가 넘게 자란 쑥갓을 포장하여 경운기에 싣고 갔던 나, 조선배추와 호배추가 어떤 차이인지 몰랐던 농부, 대파도 아니고 실파도 아니고 얼치기 파를 묶어서 ‘돈이다’를 꿈꾸었던 사람.....
그렇게 나의 농사는 눈물과 땀과는 상관없이 어이없게 진행이 되었다.
시간이 약, 그 것 뿐이었다.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어떤 상품이 좋은 상품인지 알게 되는 데는...
그렇게 13년을 엽채류 농사지으며 그래도 수원 도매시장 바닥에서는 ‘성실한 사람’, ‘신용있는 사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 ‘빼싹마른 깡다구 있는 젊은이’로 도매상인들에게 인정 받으면서 큰 돈은 못 벌었지만 식솔들 생활하는데 크게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가끔은 낮잠을 주무시고 동네 분들과 단체 단풍놀이 관광에도 따라가실 수 있었다.
엄청난 장대비를 맞으며 경운기에 짐을 싣고 시장으로 가면서 대로변에 신호대기를 하다가 까만 승용차 안에서 바라보는 젊은 여인네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의 초라함과 얼굴에 때리는 빗줄기가 가슴으로 스며들던 당시의 복받침. 뜨거운눈물과 빗물이 함께 서럽게 울게 만들었던 기억, 한 겨울,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퍼붓는 눈 속을, 살을 도려내는 듯한 추위가 계속되는 날에도 매일 시장에 나갈 물건을 싣고 경운기 시동을 걸었었던 그 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팔자에 없는 고생’이라는 등등의 생각은 크게 하지 않았다.
다만 내게 주어진 이 어려운 현실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면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더 큰 고통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견디자, 그리고 즐겁게 내게 주어진 현실을 맞이하자. 그 것이 먼 훗날 ‘덜 후회하는 인생으로 살았노라’ 하는 쾌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겨울철 비닐하우스 안의 터널을 덮어주는 보온덮개를 꺼내어 봄철에 말려서 산처럼 쌓아 놓고 비닐을 덮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끈으로 단단히 묶어 놓았다가 불이 나서 몽땅 태워버리고 꺼이꺼이 눈물을 흘렸던 날, 전선이 누전되어 부모님 살림집(비닐 하우스)을 홀랑 불 태워먹고 허탈해 땅바닥에 주저앉았던 날. 엄청난 홍수로 인해 농장이 모두 흙 속에 묻혀 울었던 날들, 태풍에 비닐 하우스 파이프가 뽑혀 공중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며 어이없어 했던 추억(??).
뿐만인가?
폭설로 작물이 잔뜩 들어있던 비닐 하우스가 무너져 내려, 죽어버리려는 충동과 가슴 도려내는 듯했던 그런 기억들...
참 많다. 아픔이 무지하게 컸다. 되돌아 보니. 후후...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꿋꿋하게 잘 견디어 온 것 같다.
그랬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고, 이렇게 깊은 숨 속에 옛날 일들을 적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랬다.
그 게 농사짓는 사람들의 공통된 애환이었고, 다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살을 애는 듯한 슬픔과 고통이었다.
뭔가 새로운 작전이 필요했다. 내 딴에는 우리 농업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해 보고 싶었다.
4Kg 상추 한 박스에 250원에 거래가 되고, 그 것도 다 팔리지를 않아 썩어서 버려야 하는 고통을,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1997년 겨울
공부도 더 하고, 뭔가 새로운 길을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그리고 농업인으로서의 내 위치의 제고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를 안고 과감하게 도전해 볼 냥으로 대학원 입학시험을 보았다.
쇠붙이가 된 머리로 공부를 하려니까 뼈빠지게 해도 머리 속에 남아있는 건 불과 10% 남짓 정도였다. 힘들었다. 종이에 중요한 단어만 크게 써서 화물차 운전석에 가지고 다니면서 신호 대기하는 그 짧은 짜투리 시간도 아까워 잠깐, 잠깐 정리해 놓은 내용을 보며 공부하였다. 몇 번을 반복해 가면서 훑어 봤는지...
시험에 무사히 통과했다.
십 수년의 농사경험이 있어 주관식 문제 답을 써내려가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집에 들어가서 찬물로 샤워하고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기를 2년.. 장학금을 타기도 했지만 그 놈의 IMF는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가하는 절대절명의 상황을 만들었다. 갈등이 말할 수 없이 컸다.
명색이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인데 공부한답시고 식구들 돌보는 것을 게을리 하거나 부모님께 소홀히 하면 그 것이 무슨 의미로 내게 다가올런지...
어떻게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기로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뒤에는 항상 0번이 서 있었다.
아이들 백일, 돌 때 선물로 들어왔던 금붙이를 팔고, 적금, 보험, 나 몰래몰래 들어놨던 것들을 중도 해약하여 학비를 대줬다.
‘최우수 졸업’ 말 그대로 단과 대학원 수석졸업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앞에 큰 절을 올리면서 논문을 바칠 때,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쩌지 못해 방바닥에 엎드린 채 일어나질 못했다.
내 스스로에게 감동을 해서인가? 아니다. 그동안 어른들 일 하실 때 죄송한 마음 감추고 학교 간답시고 나섰던 편치 않았던 상황, 눈 빠지는 듯한 아픔을 참아가며 공부했던 짜투리 시간들... 참 많은 순간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0번도 울었다. ‘여보, 수고했어요’라는 단 한마디로 여인네의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눈물이었다.
내게는 언제나 그래왔지만 이렇게 석사학위를 받는데도 주변의 많은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정신적 위로가 되었든, 실체적 도움이 되었든..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사랑이 있었으며 평생 잊을 수 없는 감사한 분들이다.
석사학위 공부를 하면서 나와 평생동지(?)가 된 허브....
분명 새로운 작물이었다.
허브를 활용하면 단순 1차원적인 농산물이 아니라 내가 계획했던 도시민들과 나, 농장이 유기체적으로 관계가 형성되고, 또한 농업에 새로운 충분한 가치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크게 망설임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양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니까 여전히 엽채류 농사를 지으면서 한 켠부터 허브로 준비해나가기 시작했다.
엉뚱한 짓하는 둘째아들의 행동들이 못마땅 하시와, 아버님께서는 나와 말도 안하셨다. 얼굴을 마주할라치면 어느새 다른 곳으로 가버리신다. 단단히 화를 내고 계신 것이었다. 풀에서 향기난다고 밭에 심어놓고, 주변에 자갈 깔고.. 밭 다 버려놨다고 노발대발 하시고..
압박과 눈치가 너무 커서 포기하고 다시 채소농사꾼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그냥 밀어 붙였다. 확신은 없었지만 뭔가가 될 것같은 막연한 기대감 하나로..
일이 잘 진행되려고 하늘이 도와주시는 건가..
1999년 2월 경, 길을 지나다가 우연찮게 찾아온 농촌진흥청의 연구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해 겨울, 눈이 엄청나게 내려서 비닐하우스 천정의 눈을 쓸어내리고 있던 땅거미 내려앉은 어느날 저녁에..
‘홈페이지 하나 만들지 않으실래요?’
‘그 거 공짜예요?’
‘허허허.. 네, 공짜로 만들어 드리는 거예요’
‘그럼 만들어 주세요.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 다는데....’
나는 당시에 인터넷이 뭔지, 컴퓨터 자판에 ㄱㄴㄷㄹ, ㅏㅑㅓㅕ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공짜라는 말에 만들어 달라했고, 그러면 농촌진흥청에서 다 알아서 해주는 건줄 알았다.
그런데 그 게 아니었다.
홈페이지에 올릴 허브 관련 자료와 사진은 내가 준비를 해야 했다.
난감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내던졌으니까 책임은 분명 져야 했다.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것들을 배워나갔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리고 자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자, 모음을 찾아 손가락 두 개로 한 글자, 한글자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낮에는 채소와 허브 작업, 밤에 집에 들어가서는 컴퓨터 앞에..
당시에 가장 빨리 잠자리에 든 시간이 새벽 세시 내외, 보통은 다음날 아침 여섯시나 일곱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두어시간 자고 나면 0번이 깨운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농원으로 출근. 눈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항상 충혈되어 있어서 마치 토끼눈을 보는 것 같았다.
45일 정도를 매일 그렇게 생활했다.
처음엔 이메일을 보낼 줄 몰라서 농촌진흥청을 밥 먹듯이 들락날락 거렸다. 자료가 준비되고 사진이 현상돼서 나오면 그 때, 그 때 들고 들어갔다.
아픈만큼 성숙하는 것이다.
1999년 4월 12일. 드디어 웹 상에 홈페이지를 올릴 수 있었다.
많이 어설프고 촌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인터넷 상에 또 하나의 내 집을 가졌다는 사실은 내게 엄청난 자극, 촉매제가 되었다.
13개월동안 홀로, 외로이 밤샘 작업을 하며 망치질, 톱질을 하면서 꾸며 나갔던 전시포장도 모양새를 드러내어 홈페이지 오픈과 동시에 일반 내방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두려웠다.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사람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한 집이 될텐데 하는 생각에..
어느 날인가... 새벽에 정갈하게 목욕재개를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붙이고 하늘을 향해 기도 드렸다.
‘하늘이시여, 제 홈페이지에 하루에 다섯명씩이라도 들어올 수 있는 홈페이지가 되게 해 주소서, 제발....’하고 말이다.
기도발이 하늘에 전달이 된 건지, 어쩐 건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면서 홈페이지는 대박을 터뜨렸다.
채소 농사짓던 공간을 허브라는 작목으로 바꿨을 뿐, 다른 외형적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까 길 지나가던 사람들은 당연히 ‘농사짓는 곳이려니..’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홈페이지를 본 사람들은 허브농원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 멀리 부산서도 원평허브농원을 방문하기 위해 찾아 왔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들도 올라왔다. 허브에 관련된 질문들..
그 때부터 토끼눈은 다시 시작됐다.
질문에 답변을 해 주려니까 거북이 같은 타이핑 실력으로, 원예 전공 안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처방할 수 있도록 답변글을 써야 했다. 평균 A4 용지 한 장 분량이 답변을 달아야 했다.
그러니 밤 새는 것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다.
무려 1년여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농원 오픈 후 1년동안 수 만명의 도시민들이 내방했다.
말이 좋아 허브농원이지, 사실은 그저 비닐 하우스였다. 예쁘지도 않고, 꾸미지도 못했다. 돈이 없어 몸으로 땜질을 했으니 당연 그럴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에선 오히려 꾸밈이 없어 편안하고, 소박해 보여서 좋다고들 했다.
그 때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지상파 방송에서 취재를 나왔고, 신문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으며 케이블 T.V, 잡지 등 수많은 노출이 시작되었다.
어느날 아침, 자고 일어나 보니까 이종노는 일약 허브계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감사, 또 감사, 이렇게 설 수 있도록 해 준 하늘에 감사하고 무엇보다도 그 겨울 비닐 하우스 천정의 눈 쓸어내리는 늦은 오후에 우연찮게 찾아와 준 농촌진흥청의 연구원이 감사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원평허브농원’과 ‘농부 이종노’로서의 이미지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허브농원 운영 13년.
많은 교육을 받았고, 표창과 상장, 인증패를 받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에서 출발하여 약 백오십만 명이 다녀간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www.herbsfarm.co.kr)
원평허브농원은 Naver 백과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대단한 영광이다. 컴퓨터 자판의 자모음 위치를 몰라 한참을 뚫어져라 보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만들었던 내가 이런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니..
홈페이지 뿐만 아니다.
적극적으로 홍보, 가능하다면 최대한 온-라인 공간을 활용해야 한다.
나는 가장 합리적이면서 효율적인 공간이 바로 인터넷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홈페이지의 네이버 백과사전 등재, 그리고 다각화된 홍보와 긍정적 이미지 확보를 위해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http://blog.naver.com/leejongnoh), 트위터 계정https://twitter.com/#!/nafarmer, http://leejongnoh.tistory.com 그리고 페이스북 http://facebook.com/#/leejongnoh. 과 미투데이에도 계정이 연결되어 있다.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청년기까지 보내다가 농촌으로 귀농하여 어느덧 이십수년.....
그 적지 않은 세월동안 쏟아 부은 땀과 눈물과 피...
사람들은 얘기한다.
‘그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겠어요....’
나는 말한다.
‘저는 지금까지 농사지으면서 고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내게 주어진 현실이기에 그저 받아들이고 열심히 일했을 뿐이에요’라고...
물론 하루에 16시간씩 일한 적도 있다. 평균 12시간 정도는 매일 일했다. 노래를 부르며, 심호흡을 하며 일했다.
가족들 잠든 새에 몰래 농장으로 나가 달빛에 의지하며 경운기로 로타리 작업을 하고, 눈 감은 채 감각으로 씨앗을 뿌리고.. 입술 부르터가며 작업해서 시장에 물건을 내가고...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이 참 많았다. 눈물과 땀을 흘리고 피를 보면서도 고생이라는 생각은 안했다.
받아들였다. 인생이라는 것이 굴곡이 있는 것이니까...
침체되어 있으면 회복해서 올라갈 기회인 것이요, 오르다 보면 정상이고, 정상이면 내려올 차비를 해야 하고 다시 빠졌어도 올라갈 기회를 봐야하는 그런 굴곡의 반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많이 심호흡했다. 나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하여..
지금.
여전히 나는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
성공이라는 표현이 적어도 내게는 없다. 성공은 정점이다. 성공했다고 판단한다는 것은 내려올 길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공이냐, 아니냐는 적어도 죽기 직전까지는 결론내릴 수 있는 성질의 단어가 아니다.
우리 농업 · 농촌이 가진 기능은 대단히 많다. 잠재적 가치는 가히 TNT와 같다.
단순히 먹거리, 1차원적인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 농촌인 것은 아니다. 대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농업, 농촌이 가지고 있는 다기능적 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하면 농업, 농촌은 엄청나게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다.
그 것이 다른 산업에 비했을 때 농업이 가진 특, 장점이다.
나는 팔자에 없는 농업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들어 왔다.
후회는 없다. 너무 좋다. 내가 농업 속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비록 어줍잖은 공간이지만 유치원생부터 노인들까지, 장애우들, 치매 노인들...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나 방문할 수 있도록 순수하게 운영되고 있고, 농원에 내방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좋아하고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놨다는 뿌듯함도 있다.
그 것이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많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해야 하는 이유이다.
앞으로도 계속 나는 대한민국의 한 농업인으로서 내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예쁘고 아름답게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가장 중요한 재산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농산물을 비롯한 제품을 생산하는 개체는 사람이요, 물건을 판매하는 이도 사람이고 물건을 사는 이들 또한 사람이라면 ‘가장 중요한 재산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런 개념이 머리 속에 항상 자리하고 있다면 소위 말하는 ‘고객관리’라는 것이 따로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물론 현대사회의 고객은 1인 10색, 1인 100색으로 한 고객이 다양한 꺼리를 충족시켜주길 원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고객관리는 결코 쉽고, 만만하게 생각할 과제는 아니다. 때문에 어떤 방법 또한 필요치 않다. 다만 친구요, 형제처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딱히 관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맘 내키는 대로 행하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 홈페이지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이나 농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주고 싶은 마음으로, 주문하는 물건 이외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물’을 돈 생각 없이 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고객관리가 어디 있을까?
내가 고객이었을 때, 판매자가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는 사람’, ‘내 물건을 사 줄 사람’이 아닌 단순하게 그냥 ‘좋은 사람들’로 보려하는 노력이 이면 그만이 아닐런지...
처음 고객(소비자)을 맞으면서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들과 작은 모니터 하나를 통해서 만나지만 아주 공손하게 맞이하는 것이 수순이다.
처음 홈페이지 개설을 시작하여 고객들을 어떻게 맞이했는지? 라는 질문에 좀은 외람된 표현이지만 질문 자체가 내겐 너무 낯설다. “맞이”가 아니다. 그저 그냥 만났을 뿐이다.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들과 작은 모니터 하나를 통해서, 그 것도 글 몇 줄 써 놓은 것으로 만났을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당연히 낯설 수 밖에 없고, 낯설기 때문에 아주 공손하게 맞이하게 되는 것이 수순이다.
그런데 어색함 속에서 깍듯이 손님을 맞이하면 손님입장에서 처음엔 당연히 대접을 받는 것에서 우쭐하겠지만 어차피 물건을 팔기 위해서 계속 그리 대한다면 나중엔 오히려 그 어색함이 커지지 않을까?
예전에 백화점을 비롯한 off-line 쇼핑센터를 방문하면 현관 앞에서 아리따운 아낙네들이 통일된 복장으로 90°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해도,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해도 여기저기서 흔하게 그런 아낙네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네들을 보면서 결코 가슴 뿌듯해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로봇처럼 습관화된, 교육 받은 대로 그들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고객들의 반응이 시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의 마케팅 개념은 20C의 마케팅 개념과 다르다. ‘감성 마케팅의 시대’이다. 굳이 ‘어떻게 대할까?’하고 고민할 필요 없이 그저 마음으로 대하는 것! 그것이 최선일 뿐이다.
어차피 다른 이들도 첨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을 터였고.... 차츰 더 많이 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자신감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홈페이지 개설을 시작하여 네티즌들이 방문하지 않았을 때 뭐랄까... 자괴감?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내 경우는 농촌진흥청에서 처음 ‘농업인 홈페이지 제작 지원사업’을 추진할 때 만들어진 홈페이지라 경영관실에서 축하 인사글을 몇 차례 써 주었기 때문에 그 글만으로도 충분히 기쁠 수 있었지만 내내 긴장감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에 혼자 서재에 앉아서 두 손 모아 기도한 적도 있었다. ‘제발 하루에 다섯명씩만이라도 들어오는 홈페이지가 되게 해 주소서!’하고 말이다.
나는 코피를 잘 흘리지 않는다. 그런데 홈페이지 운영하면서 쌍코피를 흘려 보았다. 그 것이 내가 예전을 돌아 보았을 때 가장 큰 애로였다고 생각되어진다. 지금은 웃으면서 생각할 수 있는 작은 추억이지만...
농원을 내방하는 분들에게 마치 딸이 오랜만에 친정에 와서 이것, 저것 챙겨 가듯이 대해 주었다. 처음 본 사람들과 금방 함께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정감있게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홈페이지 게시판의 질문에 답변을 할 때도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편안하게, 그리고 가능하면 전공용어 빼고 일상적으로 얘기하듯이 대화체 형식으로 해 주었다.
그래서 on, off - line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큰 어려움은 없었다.
어쩌면 주변에 많은 그런 좋은 사람들이 있어 힘들면서도, 금전적으로 어려우면서도 나는 이렇게 “자연인”의 모습을 유지하며 즐거운 마음 100배 더하여 살아갈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는 마음으로 최고의 것(허브제품들)을 제공해야 할 의무감도 있다.
그 것은 굳이 부각시키고자하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고 상충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일 뿐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다.
내가 추천하고 싶은 것은 “일단은 스스로 공부하자”이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는 없다. 남의 얘기를 많이 듣고, 책을 읽고 다른 이들의 인터넷 홈페이지나 자료를 검색해서 나의 문제점과 부각시켜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하고 항상 나를 먼저 채찍질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다른 이들의 정서, 관점을 들어보는 것도 매우 좋은 경험일 수 있다.
함께 공감하며 되새김질 하고 싶은 말들....
혁신은 기존의 자원(Resources)이 부(富)를 창출하도록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는 활동이다.
페니실린도 한때는 자원이 아니라 병균일 뿐이었다. 영국의 미생물학자 플레밍의 노력에 의해 페니실린이라는 곰팡이는 가치 있는 자원이 되었다.
- 피터 드러커 -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다. 믿으면 진짜 그렇게 된다. 그러니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져보자. 그러면 어떠한 상황에서든 잠재적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으며,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다.
- 스테반 M. 폴란의 《2막》 중에서 -
한 사람의 인간관계 범위는 대략 250명 수준이다. 나는 한 사람의 고객을 250명 보기와 같이 한다.
한 사람의 고객을 감동시키면 250명의 고객을 추가로 불러올 수 있다.
반면에 한 사람의 신뢰를 잃으면 250명의 고객을 잃는 것이다.
- 미국 자동차 세일즈 왕, 조 지라드 (Joe Girard)-
앞으로의 계획.
원평허브농원의 깨끗한 이미지와 정리정돈 된 모습, 그리고 체험프로그램의 다양화로 내내 꾸준히 찾아 올 수 있는 공간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맑은 마음으로 운영할 것이며 특히 홈페이지의 경우는 더욱 민감한 공간이므로 더욱더 신뢰할 수 있고, 편안함이 가득 차 있는 공간으로 운영하고자 한다.
아울러 대한민국 농촌의 전체 테마화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하겠으며 고객과 친구사이라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 자세로 강한 한국 농업, 농촌을 만드는데 일익을 맡으리라 다짐한다.
농업정보화에 대한 건의 사항
교육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전자상거래를 위한 공간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전 세계를 무대로 24시간 열려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전자상거래 이전에 홍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마을의 문화관광 관련 부문, 내가 농사짓고 있는 농산물의 재배환경, 재배 농산물에 대한 이론적 지식과 상식 등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한국 농업․농촌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공간으로 선 활용되고, 어느 정도 안정적 기반․기초가 다져져 갈 시점부터 전자상거래가 이루어져야 이미지를 확실하게 굳힐 수 있다.
아울러 농업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때, 농업과 전혀 상관이 없는 분야라도 넣어서 신선한 교육이 되게끔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농업이론도 충분히 중요하지만 농업, 농촌 밖의 이야기 즉 인문, 사회학 파트도 교육프로그램에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현대 농업은 몸으로만 짓는 시대가 아니다. 이미 농업도 하나의 산업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창출되어야 한다.
농촌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그저 먹거리라는 단순한 원료적가치 측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농업, 농촌은 다른 산업분야가 갖지 못한 특, 장점들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자연이라는 공간이 바로 그 것이다.
따라서 현대 도시민들이 사회생활에서 얻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농촌이며 그 꺼리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농 업인 것이다.
결국 우리 농업, 농촌의 방향은 다양한 꺼리 즉, 먹거리 이외에도 볼꺼리와 느낄꺼리, 즐길꺼리 등 구조적으로 변화된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21C 시대의 흐름은 초고속으로 흐르고 있다.
농업인들이 농업과 농촌을, 그리고 본인들이 생산한 농산물들을 동시다발적 인 유통구조를 확보하여 판매하고, 홍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터넷을 활 용해야 한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그만큼 우리의 생활을 여러면에서 빠르게 바꿔가고 있다.
원평허브농원의 경우도 인터넷 홈페이지가 없었다면, 농촌진흥청의 연구원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농원의 운영면에서도 다양한 기능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각각이 운영하고 있는 공간의 특성을 잘 유지하면서 다양한 꺼리들을 도입하여 다각화된 탄력적 운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것만이 꼭 우리 농업, 농촌의 경쟁력이다. 라는 표현은 결코 아니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최선으로 최대한의 효과가 나오고 있다면 그를 잘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또 다른 무엇, 즉 외부 요소들이 적용되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도입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원평허브농원의 경우, 정원화된 공간인 쉼터, 제품의 개발, 생산, 분화 재배, 허브 체험프로그램 운영, 허브 비빔밥, 허브 돈가스 등, 음식체험이 모두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내방객들에게 다양한 꺼리를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늘 친근하게 지내왔던 사람들처럼 편안하 게 대하고 궁금증은 최대한 많이 해결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이론적 강의 또한 무료로 해주고 있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총체적인 입장에서 운영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많은 도시민들과 학생들이 찾아오는 공간이 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첫째:
농산물을 생산하려면 적어도 소비자 대부분이 인정해 줄 수 있는 소위 말하는 명품 농산물을 만들자.
둘째:
가공이라는 부분을 두드려 보자.
쌀 10Kg 한 포대는 약 25,000원 정도 하지만 이를 가공하여 증류주를 만들면 약 213,000원의 가치가 만들어진다.
1Kg에 약 3,500원 하는 마늘을 가공하여 흑마늘을 만들면 45,000원, 마늘 식초를 만들면 416,000원의 가치가 창출된다.
이 것이 가공에 의한 부가가치의 상승이다.
요즘 농산물 가공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귤껍질, 사과껍질을 활용하여 기초 화장품을 만들고, 누에를 이용하여 정력 보강제를 만든다. 허브로 생활용품이나 의약품, 의약 부외품을 만든다.
농산물이 가지고 있는 가공은 단순 가공 뿐만 아니라 한 차원 올라간 가공품 생산도 가능하다. 얼마든지...
셋째:
체험농장으로, 교육농장으로 운영하며 그 묘미를 살릴 수도 있다.
어떤 작목을 하던 상관없이 가능하다. 아울러 그러한 과정을 마을과 연계하여 마을의 문화관광, 유적지와 연계하면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다.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지역축제가 좋은 사례이다. 대표적으로는 함평의 나비축제, 김제의 지평선 축제, 화천의 내린천 축제 등이 있다.
물론 전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축제가 너무 획일화 되어 있고, 각 지역축제별 차별성이 부각되지 못해 있으나마나 하며 예산만 낭비하는 축제가 대부분이다.
개별적이며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부분들을 인식하고 있다면 뭔가 나름대로의 신가치 창조를 위한 개발노력이 필요하다.
넷째:
위 사항들을 알리고, 도시민들이 유입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활용해야 한다.
우리 ‘농’자들은 돈이 많지 않다. 어떻게 신문, 방송에 막대한 돈을 들여가며 홍보할 것인가?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돈 크게 들이지 않아도 운영의 묘미만 잘 살린다면 엄청나게 큰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 것은 곧 우리의 경쟁력 확보에 지름길인 것이다.
부디 앞으로 언제까지라도 한국 농업, 농촌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꾸 멀리, 멀리서 찾으려 한다. 아니다 우리 곁, 가까이에 있다.
무지개 잡으려고 산 너머, 산 너머 멀리, 멀기 가 보았지만 결국 무지개는 잡지 못하고 소나기에 옷만 흠뻑 젖지 않았는가?
그 무엇도 탓하지 말며 그저 내 머리와 가슴, 그리고 주변에 무지하게 많은 좋은 꺼리들(교육, 책, 상호 이야기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좋은 결과 있는 농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내게 인터넷 공간에 홈페이지를 가질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 준 농촌진흥청과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모든이들에게 두 손 모아 깊은 감사드린다
******** 이 글은 귀농, 귀촌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잠시 생각하며 공통분모를 찾는데 함께하고자 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크게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걸음을 걷고 싶다면 걸음보다 먼저 기는 법과 서는 요령을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것이고, 뛰어다니고 싶다면 잘 걷는 것부터 배워야 함이 맞지 않을런지요?필요한 분들이 계시면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마는 먼저 들어와 시작하여 자리잡아 살고 있는 제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따로 있겠지요?
남의 얘기들, 방법들은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곳곳에서 필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파이팅들 하십시오. 기원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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